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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주자유여행

여행분류 | 1일투어
출발도시 | 상하이
출발시간 | 매일출발가능
예약시간 | 3일전 예약 요망
출발인원 | 4인출발기준 ( 기타 인원 별도 문의 )
조 회 | 970
성인 가격 | ¥580원
성인 가격 | w 106,000원
여행일정

포함 사항
1.전용차량 
2.중식 포함 ( 식사 1끼)
3.관광지 입장료 
4.가이드 
5.기사/가이드팁

불포함 사항
1. 여행자 보험 
2. 기타 개인 경비 
3. 중국<->한국 구간 왕복티켓 
4. 호텔필요시 별도예약


4명시:580원/인    10명시:450원/인



여행지소개
 소주
소주는 강소성의 동남부 양자강 삼각주 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상해 남쪽으로는 절강성,서쪽으로는 태호,북쪽으로는 양자강과 인접해있습니다.면적은 6264평방키로메터이며 인구는 599만명이며 그중 시내인구가 백만명정도로서 상해보다는 상당히 작은 도시이지만 중국의 역사문화유적지의 하나로서 2500년의 도성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물의 고향,원림의 도시이기도 합니다.연평균강우량은 1200㎜입니다.
<동방의 베니스>로 불리울만큼 사방이 운하로 둘러있고 작은 운하들이 교차되여 있으며 호수,강,연못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원이 있고 따라서 풍경이 아름다운 구릉이 이어지며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되여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2500년전 춘추시대 오나라왕 함려는 오자서한테 명하여 함려대성을 건설하였는데 그 둘레의 길이가 47리이고 수륙성문이 여덟개, 크고작은 골목거리가 60여개로 장방형모양의 성지를 건설하였는데 그 성지가 대체적으로 지금의 소주성의 기본규모를 가져왔습니다.진시황의 전국통일후 소주를 오현이라고 불렀으며 수나라때부터 소주라고 불렀습니다.
소주는 깨날소 고을주인데 그 이름으로부터 어미지향이라는것을 알수있습니다.소주소자는 풀소자에 어미어자 벼화자 세부분으로 되였는데 이 글자로부터 소주는 옛날부터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기로 강남이 족하면 천하가 편하다는 말도 있습니다.<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이 있다.>이런말 들어보셨죠?여기서 소는 소주를 말하는것이고 항은 항주를 말하는데요.소주가 예로부터 천당에 비하여 살기 좋은곳으로 소문이 난것은 <어미지향>이기때문입니다.또한 소주는 옛날 비단장수 왕서방의 고향으로서 소주지역의 경제발전의 주역은 바로 비단이였습니다.중국은 당나라때부터 시작된 율동제에 의하여 중국의 곤복을 색갈별로 정했는데 그옷감은 바로 비단이였습니다.정교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물론 자수와 옥,공예품으로도 유명합니다.또한 옛말에 <강남의 정원은 천하에서 제일이고 소주의 정원은 강남에서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을만큼 소주는 정원으로 유명한 고장인데요.소나라때는 많은 관료들이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사를 지었으며 20세기초에는 이미 200여군데의 개인정원이 조성되였습니 .



유원

유원은 북경에 있는 이화원,하북성 승덕 피서산장,소주의 졸정원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중 하나로 유네스코에 가입된 세계 문화유산중 하나입니다.
정원은 지금말로는 별장이면서도 주인의 주요거주지이기도 한거죠. 특징은 집밖에 안 나가고도 산수를 즐길수있다는게 주요특징이죠. 이화원은 황제의 정원이고 승덕피서산장도 황족의 산장이죠. 대체적으로 북쪽에는 황제의 정원,남쪽에는 개인정원입니다. 이유는 명나라때부터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이고 어느관리가 황제의 코밑에다 화려한 별장을 짓고 살리겠습니까? 황제또한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한때가 아니라서 너무멀면 불편하죠. 해서 북쪽에는 황제정원,남쪽에는 개인정원으로 구성된것입니다. 유원은 명나라때 서태시라는 고관이 지은 개인 정원입니다.
그당시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비단장사도 하고 농사를 지어서 모은 돈으로 마현한 정원입니다. 유자는 남길유자, 연원히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으라는 의미에서랍니다. 일제시기 일본놈들이 소주를 침범했을때 엄청나게 파손되였습니다. 또 항일전쟁이 승리한후에는 국민당군대가 유원에 머물게 되였고 또 말을 기르게 되였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유원을 다시 복건하고 1954년부터 대외로 개방하였습니다





 한산사
소주시의 서북쪽에 위치한 한산사는 남북조시대의 502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로 묘리보명탑원이라 하였고,당대의 고승 한산이 기거하여 한산사라 불리게 되였다.
당나라 장계라는 사람이 과거에 3번씩이나 낙방을 하고 귀향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 을 청하다 늦은 밤 한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당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지었는데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시가 바로 “풍교야박”이다.시구절에 매료되어 한산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청대의 강희황제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나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 한 시가 되었다.시에 나오는 종은 세번 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하는데,원래의 종 은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고,현재 신년맞이 타종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종루에 남아있 는 종은 약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치형의 다리와 수로 위에 떠있는 작은 배 등의 어우러진 주변 경관과 한산사의 풍 경은 소주 특유의 아름다운 고전미를 뿜어내고 있다.꼭 철령관을 지나 풍교에 올라,당 시의 시를 음미하도록 하자.
枫桥夜泊                      풍교 야박
月落乌鸣霜满天    달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江枫渔火对愁眠    강가 단풍나무,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졸고 있네
姑苏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
夜半钟声到客船   다



호구탑

호구산은 아주 먼 옛날 해용산이라고 불렸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다 바다였는데, 그 중 섬 하나만 밀물이 올땐 섬이 잠겨 보이지 않다가 썰물일 때 수평선에 섬으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해용산이라고 부르게 된거죠.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함려는 해용산에 성을 쌓고 오나라를 지배하게 되는데요. 그 때 월나라 국왕 윤상이 사망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군사를 거닐고 월나라로 쳐들어갔는데 이 소식을 접한 태자 구천이 묘한 계책을 씁니다. 쉬지않고 달려온 오나라 군사가 월나라 경계에 들어서자 마자 군사로 변장을 한 사형번죄자들을 풀어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을 하게 했습니다. 스스로 목을 베는 군사들을 보고 너무 신기하여 오라나 군졸들이 그리로 몰려가서 구경을 하였는데, 그 틈을 타서 매복하고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마차를 타고 있는 함려를 향하여 진공을 가했습니다. 그 경활중에 함려는 발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죽게됩니다.
해서 함려의 시신을 황궁이 있는 해용산에다 민부 10만명을 동원하여 지하궁전을 만들고 그 안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사 3일만에 함려 묘 위에 백호 한마리가 나타나 크게 울부짖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향간에서는 함려의 패기가 호랑이로 현신되었다는 설이 돌게 됩니다. 그 뒤로 호랑이 호자와 언덕 구자를 써서 호구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삼당거리

삼당거리는 당조 보역년대(825년)에 당조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만든것입니다.
소주에 부임되여 온 백거이가 호구탑을 시찰했답니다.교통이 너무 불편함을 느낀 백거이는 소주의 수로와 육로를 편리하게 하기위하여 호구탑동쪽부터 삼당하를 따라서 운하를 팠어요.삼당하 제방뚝우에 도로를 만들었어요.하여 삼당거리라고 합니다.한국의 인사동이라고 말할수 있다.양쪽으로 이어진 전통의 옛거리는 천여곳의 상점으로 다양한 중국의 민속과 음식 등 각종 물건을 판매하고 있으며 고풍스러운 건물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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